세상사는이야기

당신의 영어는 안녕하십니까?

서비나라 2008. 1. 29.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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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당신에게 무엇입니까. 차기 정부가 영어를 중시하는 교육정책을 발표하면서 영어 교육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어릴 때부터 ‘영어 잘해야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중·고교 내내 시달린 것도 모자라 대학 때는 어학연수를 다녀오고 토익·토플과 전쟁을 치렀던 20∼30대 직장인들. 그들은 아직도 영어가 힘들고, 짜증나고, 두렵다. 새 정부의 교육정책을 따라가자면 자식을 1년쯤 조기유학 보내야 한다는 얘기도 들린다. 도대체 영어와의 싸움은 언제 끝날까. 직장에 들어가서도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실력 때문에 주눅 늘기 일쑤다. 매일 새벽 학원으로 향하면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영어는 나에게 무엇이냐고.

영어에 중독되다

인천에서 광화문까지 출퇴근하는 박용진(31·회사원)씨의 귀에는 언제나 영어학습용 MP3 플레이어가 꽂혀 있다. 주변에서는 그를 ‘영어공부 중독자’라고 부른다. 긴 통근거리에 지쳐 토요일에는 쉴 법도 하지만, 박씨는 강남에 있는 유명어학원의 강좌를 듣기 위해 평일과 똑같이 집을 나선다.

박씨는 영어 공부에 중독된 것이 대학 동기들 사이의 묘한 경쟁심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 복학 뒤 동기들과 재미 삼아 단체로 토익 시험을 봤는데 박씨만 500점대가 나오고 다른 친구는 모두 750점 안팎을 받은 것. 그때부터 동기들은 “야! 잠만 자지 말고 공부 좀 해라.500점이 뭐냐.”고 비아냥거렸다. 물론 장난이었지만, 박씨는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학부 전공이 중어중문학이어서 토익을 같이 보러 다녔던 동기 대부분이 중국으로 연수를 떠났다. 하지만 박씨는 고민 끝에 뉴질랜드로 갔다.6개월쯤 뒤 동기들과 다시 만난 박씨는 설움을 씻고자 토익을 다시 보자고 말했다. 하지만 웬걸, 중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친구들은 700점대 후반을 유지했지만, 박씨는 영어권으로 연수를 다녀오고도 770점에 그쳤다. 친구들이 더 심하게 놀렸다. 연수는 ‘폼’으로 다녀왔느냐고. 다시 이를 악물고 토익 공부에 전념했다. 고등학교 때도 다니지 않았던 학원 새벽반에 나갔다. 몇달 뒤 940점을 받았다. 이후로는 친구들이 토를 달지 못했다. 대학 친구들과 쓸데없는 자존심 대결을 펼치던 습관 때문에 지금도 박씨는 영어회화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굳이 성적표는 필요 없지만 지금도 3∼4개월에 한 번쯤은 토익 시험을 봅니다. 너무 오래 안 보면 왠지 불안하다고 할까요. 물론 토익 학원은 이제 안 다녀요. 요즘은 재미 삼아 동시통역대비반을 다니죠.”

정수연(30·여·회사원)씨는 대학 3학년 때 1년 동안 영국으로 연수를 다녀왔다. 친구들이 취업용 토익이나 회화를 공부했지만 수연씨는 워낙 영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제대로 공부하지 않고 치른 첫 토익시험에서 900점이 나왔다. 친구들은 공부도 하지 않고 점수가 잘 나왔다며 시샘하거나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최고의 직장으로 꼽히는 S전자에 들어갔다. 문제는 입사 초기에 일어났다. 영어로 기획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라고 지시 받았다. 평소 영어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사들 앞에서의 프레젠테이션은 부담스러웠다. 며칠간 잠도 자지 않고 미친 듯이 프레젠테이션 내용을 외웠다. 하지만 프레젠테이션 당일, 미국에서 오래 살다 온 상사가 그냥 자기가 하겠다고 했다.

잠시 당황하는 사이 그는 정씨가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서 겨우 외운 내용을 단번에 이해하더니 다른 임원들 앞에서 거침없이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동안 영어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이 있더라고요. 자만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성과물을 상사가 가로챈 것 같아 속상하기도 했지만 솔직히 그가 나보다 발음도 좋고 유창해 내가 했더라면 더 못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영어를 놓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하루에 한두 시간씩은 꼭 투자하고 있죠.”

대통령직 인수위가 앞으로 학교에서 영어로 수업하겠다고 발표한 것에 정씨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학교에서 12년 동안 영어를 배웠어도 ‘밥 먹었냐.’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할 만한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더라고요. 영어를 체계적으로 가르칠 필요는 있지만, 학교나 교사가 얼마나 준비됐을까요.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밀어붙이면 영어학원만 배불리는 것 아닌가요.”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 마음뿐

최정현(28·여)씨는 다짜고짜 “영어를 증오해요.”라고 말했다. 중·고교 때부터 아무리 노력해도 영어 점수가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아 고생했다. 수능 듣기평가 때도 영어 듣기에서 틀린 것이 독해에서 틀린 것보다 많아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는 데 발목을 잡았다고 했다.

대학에 다니면서 ‘주XX영어’ 강좌를 듣게 됐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큰소리로 따라서 영어 뉴스를 읽곤 했다. 강사가 억지로 따라 읽기를 시켰다. 부흥회 같기도 해서 며칠쯤 듣다가 견디지 못하고 그만뒀다.

취업은 해야 하겠기에 유명하다는 토익 학원들을 섭렵하며 성적을 올려보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토익 공부를 시작한 지 거의 2년 만에 억지로 짜내듯 900점을 얻었다. 성적표를 보는 순간 눈물이 날 정도였다. 만족할 만한 곳에 취업했지만, 영어가 또다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미친 사람처럼 영어를 따라 읽어대서 싫다고 뛰쳐나왔던 ‘주XX 영어’ 강좌를 회사에서 하더라고요. 부장과 과장도 미친 듯이 따라 하는데 입만 뻥긋 거릴 수 없더라고요.”

최씨는 “도대체 영어 공부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 요즘은 ‘네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마음이에요. 영어 앞에서 작아지는 내가 정말 싫어요.”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수위의 영어교육 방침에 최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그나마 일찍 태어나 험한 꼴 안 보게 돼 다행이지만, 나중에 우리 아이가 겪을 것을 생각하면 답답해요. 억지로 공부하고, 잘하는 아이들 쳐다보면서 굴욕감을 느끼게 한다면 오히려 아이들 기만 꺾어 놓는 것이 아닐까요.”

답답한 마음에 읽은 학습수기만 수백건

공인회계사 시험을 4년째 준비 중인 최모(30)씨는 일찌감치 시험 준비에 들어가서 다른 친구들처럼 토익이나 영어회화 공부는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갑자기 회계사 시험에서도 토익 700점을 넘어야 한다는 조건이 생기면서 꼬이기 시작했다.‘토익 700점이 별거야.’라며 따로 준비하지 않았지만 막상 시험을 보니 좀처럼 토익 점수가 나오지 않았다.

“한번은 토익 700점이 안 돼서 회계사 시험을 못 볼 뻔했어요. 미치겠더라고요. 회계사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불과 몇 점 차이인데, 엉뚱하게 영어가 발목을 잡다니. 정말 이 죽일 놈의 영어,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 다닐 때 토익 700점 미리 만들어 놓을 걸 그랬다는 후회 뿐이에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최은희(26·여)씨 역시 영어 탓에 고전하고 있다. 토익이야 비교적 단어들이 쉬운 편이지만 공무원 시험에 나오는 영어문제는 단어를 얼마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점수가 확 달라질 만큼 어려운 단어가 많이 나온다.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모를 ‘이상한’ 단어들을 외우고 있노라면 가끔은 영어 알파벳을 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물론 난이도를 조절해야 하는 시험이니 어렵게 출제하겠지만, 그래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고 한다. 다른 과목은 노력한 만큼 점수가 따라주는데 영어는 시험을 볼 때마다 들쭉날쭉하기 때문이다. 하도 점수가 나오지 않아 ‘성문영어’도 뒤져보고 단어만 1주일 내내 외워 본 적도 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남들은 공무원 시험 볼 때 가산점을 받는 독립유공자가 부럽다고 하는데 난 영어 잘하는 친구들이 부러워요. 영어는 아무래도 선천적으로 감을 타고난 사람이 잘하는 것 같아요. 답답한 마음에 읽은 영어학습 관련 수기만 해도 몇백 개는 될 것 같아요.”

토익점수 높으면 인기도 ‘레벨업(?)´

몇 년 전만 해도 대학에서 인기 있는 선배는 밥이나 술을 많이 사주거나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자기 주장을 활발히 펼치는 선배들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토익 점수 높은 선배가 인기가 많다고 박진영(27·대학생)씨는 말했다.

한번은 여자 후배들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평소에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지내는 남자 동기가 있었는데, 술을 마시다가 그 동기의 토익 점수가 900점이 넘는다는 사실이 알려졌다.“여자 후배들이 ‘학원은 어디 다녔냐. 책은 무엇을 보냐.’며 갑자기 관심을 갖더라고요. 그러면서 집은 어디인지 묻는가 하면, 자기한테 토익 비법을 가르쳐 달라는 등 난리가 났어요. 갑자기 술자리의 주인공은 그 친구가 돼 버린 거죠.”

“요즘 후배들이 대학 1,2학년 때부터 토익 준비를 한다길래 그런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토익 점수로 선배의 능력이 평가되는 것 같아서 씁쓸하네요.”

임일영 이경주 신혜원기자 argus@seoul.co.kr

외국인 강사들이 본 한국 영어교육

경기도 평택의 한 어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존 밀러(25)는 “한국 아이들은 영어와 ‘생활’하지 않고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이들이 주입식 교육에 익숙해 카드나 그림 등을 이용한 재미있는 수업을 지루해한다고 말했다. 또 아이들은 부모의 강요로 학교와 학원에서 몇 시간씩 영어를 공부하고는 집에 돌아오면 잊는다고 했다.

“영어는 단어 자체가 어려운 데다가 언어의 특성상 단시간에 외울 수 없는데 한국에서는 이런 것을 강요하면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어요.”

또한 그는 영어 조기교육 역시 어머니의 강요로 아이를 희생시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한두 명의 특별한 성공케이스는 학원의 교육보다는 아이 스스로가 흥미를 느낀 덕분이라는 것. 그는 “현재의 영어교육 방식이 토익·토플 점수는 높일지 모르지만 회화는 못 하는 사람을 만든다.”고 꼬집었다. 그는 2010년부터 공교육 과정에서 영어수업을 영어로만 한다는 새 정부의 정책이 효과가 없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한국어로 하던 주입식 교육을 영어로 하는 변화만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반면 서울 강동구 둔촌동에서 영어강사를 하는 크리스 도일(30)은 한국의 영어 열풍은 세계화 추세에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경험상 영어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은 솔직히 없었다.”면서도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영어를 습득하는 노력이 한국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요즘 아이들은 만화, 음식, 여행 등으로 미국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아 금방 색다른 문화에 매료되는 특성이 있다고 했다. 크리스는 새 정부의 영어정책이 믿음직스럽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재 영어 교사들이 유창하게 영어로 영어를 가르칠 준비는 안 돼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영어를 배우는 최고의 방법은 영어로 영어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한국 특유의 영어 열풍이 힘을 발휘하면 분명 새 영어교육이 성공할 것이라고 봅니다.”

출처 : 서울신문 이경주 신혜원기자 kdlrudw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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