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이야기

나 자신의 변화문제

서비나라 2007. 10. 15.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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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영
문헌정보(주)대표/숙명여대 정보과학부 겸임교수


글로벌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자 코드는 한마디로 ‘변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변화는 때로는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저항과 맞물려 시끄럽기도 하지만 변화의 당위성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변화의 중심이자 출발점은 주어진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먼저 변화하지 않고는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먼저 변화하면서 처해있는 환경에서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살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변화는 때로는 자기 내면의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철저한 자기반성과 익숙한 것과의 결별 그리고 시련과 고통이라는 연단이 수반될 수 있다. 그리고 변화는 우리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생활 속에서 익숙한 자기습관으로부터의 철저히 탈피를 해야 될 때도 있다.


습관이라는 변화의 장애물
에리히 케스터너라는 독일 작가가 친구와 장거리 기차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는 피곤했던지 의자에 기대어 곤하게 잠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에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옆에 있는 친구에게 외쳐댔다.

“큰일 날 뻔했다. 하마터면 수면제 먹는 것을 잊어버릴 뻔했구나!”
라고 하면서 황급히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고는 다시 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습관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으로 습관은 이와 같이 한 사람의 사고방식이 행동으로 나타나 그 일생을 좌우한다고 볼 수 있다.


내면의 변화문제
스위스의 문학자 겸 철학자였던 아미엘이 남긴 ‘일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마음이 변하면 태도가 변한다. 태도가 변하면 습관이 변한다.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한다. 인격이 변하면 인생이 변한다.”

자기 혁신이란 곧 마음에서 시작된다. 마음이 변하면 인생이 변하는 것이다.
앤서니 라빈스의 「인생을 바꾼 성공 노트」에 보면 “시작과 창조의 모든 행동에 한 가지 기본적인 진리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하겠다는 결단을 내린 순간 그때부터 하늘도 움직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미국의 젊은이들이 세계적 경제공황으로 미래를 잃고 실의에 빠져 방황하고 있을 때 오리슨 스웨트 마든이라는 사람은 그의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습관이 만들어질 때는 눈에 안 보이는 실과 같지만 그 행동을 반복할 때마다 그 끈이 차츰 강화되고, 거기에 또 한 가닥이 더해지면 마침내 굵은 밧줄이 되어,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든다.”

자신이 처해있는 환경에 대한 자신의 변화에 대한 노력은 자신에게 변화를 주게 되고, 그것은 자신의 삶 전체에 어떠한 결과를 가져다준다. 그 결과는 어떤 의미에서는 삶의 형태를 통째로 바꾸어 놓는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변화라는 것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고 아니면 거대한 환경의 변화로 처해있는 상황의 변화일 수도 있다.

여기서 나 자신의 변화문제 일 때는 처음 습관이 중요하고, 습관을 바꾸려면 내가 먼저 변화해야하는 나 자신의 변화문제에 부딪친다.

환경의 변화는 자신에게 기회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먼저 변화하지 않으면 그 어떠한 중요한 기회를 잃는 경우가 될 수도 있다.

‘변화’는 명사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물의 형태, 모양, 성질이 달라진다는 동사의 의미를 담고 있듯이 환경의 변화로 인한 변화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머리 속 지식으로 만 알고, 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정한 변화가 아니면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수 있다.

변화는 관념 속에 머물러 있는 변화가 아니고 손과 발로 내려간, 그래서 행동으로 표출되는 실체적 변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진정한 변화가 없는 사람은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여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자기 자신은 물론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을 망가뜨리는 한 원인이 될 수 가 있다.

정보사회에 새로운 성공적인 삶의 주인공이 될 것인지, 아니면 변화를 포기하여 과거에 머물 것인지, 미래를 준비하며 진정으로 나 자신 스스로가 변화를 시도할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모든 것은 나 자신이 먼저 변화를 받아들이느냐 또는 먼저 변화하느냐는 하는 내면의 변화문제이기 때문이다.

브라이언 카바노프의 ‘씨 뿌리는 사람의 씨앗’이라는 저서에 이러한 글이 있다.

도끼를 잃어버린 농부가 이웃집 청년을 의심했다. 그 청년은 도둑처럼 걸었고, 도둑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농부는 밭을 갈다가 그곳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도끼를 발견했다.
그 다음부터 그가 그 이웃집 청년을 보았을 때 청년은 다른 청년들과 똑같이 말하고 똑 같이 행동했다.

이러한 경험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알게 모르게 조그마한 사건이지만 자기 자신이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대부분 스쳐지나 갔거나 뼈아픈 경험을 했으리라 여겨진다.

우리가 의심을 받는다는 사실은 본인도 그렇고 의심을 하는 사람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나 의심을 받다가 시간이 흘러 그 의심이 해결이 된다면 그 자신의 삶에 신뢰의 믿음은 물론 내면의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1초가 세상을 변화시킨다

말 한마디를 할 수 있는 시간 단위인 1초가 마음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일본 세이코 시계 광고카피에서 표현하고 있다.

‘처음 뵙겠어요.’ 이 1초의 짧은 말에서 일생의 순간을 느낄 때가 있다.
‘고마워요.’ 이 1초의 짧은 말에서 사람의 따뜻함을 알 때가 있다.
‘힘내세요.’ 이 1초의 짧은 말에서 용기가 되살아날 때가 있다.
‘축하해요.’ 이 1초의 짧은 말에서 행복이 넘치는 때가 있다.
‘용서하세요.’ 이 1초의 짧은 말에서 인간의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안녕.’ 이 1초의 짧은 말에서 일생 동안의 이별이 될 때가 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한순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때로는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하며 1초가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치만 알아도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끼며 아름다운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위험과 기회
어느 시대이고 변화가 있을 때는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불확실성 시대이다. 그것은 위기의식 없이는 변화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인간의 기본 속성과 새로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는 관념의 차이가 공존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변화가 우리들의 정신을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변화에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바로 나 자신이 먼저 변화하는 것이다.

변화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 일수도 있지만 그러나 변하지 않는 것처럼 가장 위험한 일도 없다.

몇 가지 사례로 도끼를 잘 다루던 성실한 벌목공이 전기톱이 발명되자 흐름을 읽지 않고 있다가 하루아침에 해고된 일화나, 사이버 주식거래를 가볍게 여기다가 경쟁사에 밀려 문 닫을 위기에 놓였던 벨기에의 엔트워프 증권거래소나 미국의 유명 타자기 메이커인 스미드 코로나사가 컴퓨터 세상에서 주 상품인 타자기 생산을 고집하다가 가정이나 기업들이 퍼스널 컴퓨터로 옮겨가는 흐름을 읽지 못하여 힘없이 밀려난 사건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전환비용
1873년에 한 쿼티라는 타자기 회사가 키보드를 고안하면서 자판배열이 타자기의 글쇠가 엉클어지지 않도록 하기위해 QWERTY~로 배열한 다.

이것은 너무 빨리 자판을 두드리면 글씨가 엉키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어렵게 자판배열을 하여 타자치는 속도를 줄여서 글씨가 엉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한편으로는 타자기 회사의 영업사원이 타자기를 팔기위해 고객들을 대면하면서 펜으로 글을 쓰는 것보다는 타자기가 빠르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판의 배열을 지금의 영문 쿼티(QWERTY)자판과 같이 타자기 회사이름으로 하면서 고객에게는 쉽게 타자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영업활동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자판의 배열 자체가 타자기의 기계적 특성에 무리가 안 가도록 자판배열을 어렵게 제작하였던 까닭도 있다. 그러한 사실에 1930년에 드보락이라고 하는 사람이 쉽게 칠 수 있는 자판배열을 개발했으나 아직도 쿼티가 컴퓨터의 자판배열로 가장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어지고 있다.

세월이 흘러 그 사실을 알고 누구나 어렵지 않게 타자를 칠 수 있도록 자판배열을 쉽게 한 컴퓨터 키보드가 지속적으로 발명되어 특허로 등록이 되었고 상품화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그동안 시간을 투자하여 익힌 타자속도 때문에 쉽게 다른 키보드로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는 경제학적인 용어로는 ‘전환비용’이 너무 크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타자를 쉽게 배울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으나 쉽게 익힐 수 있는 키보드 회사가 문을 닫거나 상품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아 지금도 어렵게 배열한 자판을 익히고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우리들 자신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탈피하여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비전상실 증후군
프랑스에 가면 유명한 ‘삶은 개구리’ 요리가 있다고 한다. 이 요리는 손님이 앉아 있는 식탁 위에 버너와 냄비를 가져다 놓고 직접 보는 앞에서 개구리를 산 채로 냄비에 넣고 조리한다. 이 때에 물이 너무 뜨거우면 개구리가 갑자기 펄쩍 뛰어나오기 때문에 맨 처음 냄비 속에는 개구리가 가장 좋아하는 온도의 물을 부어 두고 시간을 두고 서서히 가열하면 개구리는 자기가 삶아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도 모른 채 기분 좋게 잠을 자면서 죽어 가게 된다.

개인이나 기업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으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그럭저럭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면, 그것은 마치 자기를 요리하는 물이 따뜻한 목욕물이라도 된다는 듯이 편안하게 잠자다가 죽어가는 개구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로마제국이나 통일신라가 멸망한 것은 외부의 침략 때문이 아니다.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어떤 목적이나 비전이 사라짐으로써 서로 단결하지 못하고, 목적과 목표 의식이 없어져 그냥 내부에서 저절로 무너져 내렸던 역사적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현실의 편안함에 안주하면서 비전과 목표 없는 삶을 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전상실증후군」이라는 중병에 걸리게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주변의 상황이 덮쳐올 때에 이미 따스한 온도에 익숙해 있는 프랑스의 개구리요리처럼 삶아져 다시 살아나기에는 이미 때가 늦을 수가 있다.


허버트 후버 대통령
미국의 제 31대 대통령이 되었던 허버트 후버의 청년시절의 일화이다.

후버는 미국의 명문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졸업할 당시 갑작스런 미국경제의 불황으로 취업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그는 용기를 내어 지방의 한 광산 근로자로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깊은 산속 탄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곳 광산 근로자들은 대학까지 졸업한 후버를 질투한 나머지 청년 후버를 그냥 놔두지 않고 요즈음 유행하는 말로 ‘왕따’를 시킨다.

그래서 종종 동료들에게 무시당하기도하며 몰매를 얻어맞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후버는 이에 굴하지 않고 묵묵히 어려운 동료들을 챙기면서 광산 근로자로서 맡겨진 일을 누가 곁에서 지켜보거나 말거나 충실하게 자기가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여 일한다.

오랜 기간 그의 변함없는 행동은 동료 광산노동자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고 그 결과 그는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아 작업반장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뉴욕 맨하탄 본사로부터 사장이 그곳 광산출장소를 시찰하게 되는데 당시 광산출장소 소장이 본사 사장에게 생산실적 보고를 하다가 젊은 청년 후버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이곳 광산 출장소에서 본사 사장은 젊은 청년 후버가 대학까지 나오고도 이곳 광산까지 찾아와 학력에 관계없이 열심히 땀 흘리며 일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감동을 받은 사장은 그날로 후버를 뉴욕 본사로 데려가 광산기사로서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하였고,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을 받으며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그동안 자기가 모은 대부분의 재산을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의 기아 난민들을 위해 구제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동안 모은 재산을 내놓게 되었고, 그 사실이 언론에 알려지자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요청으로 식량국장을 거쳐 상무장관까지 지내게 되었고, 이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대통령까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후버는 자기 앞에 놓여있는 환경을 탓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며 자기변화를 시도하였고 그 사회에 적응하면서 훌륭해진 인물이다.

러시아의 유명한 대문호 톨스토이는 “누구나 한 번쯤 인류를 변화시켜보자는 꿈을 가진다고 한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겠다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다”라는 이야기를 남겼다.

이 말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인이 변화되기를 바랄뿐 자기 자신이 먼저 변화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있는 한 주교의 무덤 묘비에 적혀 있는 글로 임종 직전에 한 말이 묘비에 적혀있다.

‘내가 젊고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끝없이 펼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그런 꿈을 가졌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세상이 나로 인해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로 인해 달라지는 모습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깨닫는다.

그들이 변하기 전에 만일 “나 자신이 먼저 변화했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가 좀 더 좋은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었을 것을...

그리고 또 누가 알겠는가? 온 세상까지 변화되었을지도...’
모든 것은 나 자신 내면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내 안의 문제이다.


외과의사의 교훈
미국의 아주 유명한 외과 의사이자 훌륭한 교수가 의사가 되고자 갓 입학한 제자들에게 외과의사가 되려면 적어도 중요한 두 가지 자질은 갖고 있어야 된다고 하면서 그 두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외과의사는 조교에게 분비물을 받아오게 한 다음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첫 번째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역겨운 냄새와 썩은 고름과 같은 더러운 분비물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끔찍하지마는 외과의사라면 당연히 그러해야 할 것이라고 학생들은 인정을 했다.

두 번째는 사람의 생명을 다루기 때문에 남 보다 훨씬 더 예민한 관찰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다음에 접시에 받아온 더럽고 냄새나는, 고름이 담겨진 그릇에 손가락을 푹 담갔다가 꺼내어 입술로 핥고 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와 같이 나와서 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씩 앞으로 나오세요.”

모두들 한결같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더럽고 냄새나는 고름이 담긴 그릇에 손을 넣는 것조차도 역겨운 일인데, 그 손가락을 입으로 핥는 것은 더욱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역겹고 따라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여기다가 인생을 걸었기에 그렇게 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 학생들은 한 명씩 앞으로 나와 그 접시에 담긴 분비물에 손가락을 넣었다가 입술로 핥기 시작했다.

어떤 학생은 눈을 딱 감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기 손가락을 빨기도 했고, 어떤 학생은 손가락으로 맛을 보는 시늉만하다가 들어갔다.

모두가 그렇게 하기를 마친 후에 이 외과의사는 말하기를 여러분은 훌륭한 외과의사 의 자질을 갖기에는 50퍼센트 정도 밖에 갖고 있지 않다고 하면서, “여러분은 첫째 자질에 대해서는 아주 우수하게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러나 둘째 자질에 대해서는 형편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학생들은 의외로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첫째 자질이라고 하는 것은 온갖 더러운 것과 역겨운 냄새와 썩은 고름 같은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자질은 예민한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교수님이 직접 그 더럽고 냄새나고 역겨운 고름이 담긴 그릇에 손가락을 푹 담갔다가 꺼내어 입으로 핥았다. 그리고 학생들도 그대로 따라했다. 그런데,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두 번째 자질이 형편없다고 말했다.

그 까닭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나는 이 더러운 곳에 분명히 손가락을 넣었지만, 나중에 입으로 빤 것은 다른 손가락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 다른 손가락을 자세히 보지 못했습니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외과 의사들이 놓칠 수 있는 즉, 예민한 관찰력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이야기였다.

자기는 분명히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분비물을 찍은 손가락이 아닌 그 옆 손가락으로 맛을 보았는데 그것을 제대로 관찰하고 따라한 학생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속담에도 훌륭한 외과의사에게는 독수리와 같은 눈에 사마귀 같은 마음, 그리고 여자의 손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에게 그만큼 자신이 예민한 관찰력을 기르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교훈으로 주려고 했던 모양이다.


변화의 어려움
어느 학교 선생님의 가정에서 있었던 일로 어느 날 자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다가 아들에게 텔레비전을 그만 보고 끄라고 말을 하였다.

그러자 그 아들은 리모콘으로 끄지 않고 텔레비전 앞에 다가가더니 발가락으로 버튼을 눌러 끄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선생님은 곁에 있던 아내에게 아이가 왜 이렇게 버릇이 없느냐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그 아내는 아이가 얼마 전 당신이 그렇게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보고 배운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만큼 자기 자신이 먼저 실천하며 역할모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인도의 전래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어느 마술사가 어느 모퉁이에서 쭈그리고 앉아 부들부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쥐를 발견하게 되었다. 왜 그런가하고 살펴보니 고양이 때문이었다. ‘이 쥐를 고양이로 만들면 두려움이 없어지겠지.’ 그래서 마술사는 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자 고양이로 변신한 쥐는 두려움이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몸집이 커다란 개를 만나게 되자 다시 두려움이 찾아 왔다. 마술사는 다시 고양이를 개가 되도록 했다. 한때 쥐와 고양이였던 개는 잠시 안심했으나 곧 호랑이를 만났다. 이번에도 마술사는 개를 호랑이가 되게 해주었다.

그러나 얼마 후 그 호랑이는 숲 속에서 사냥꾼을 만나 두려움에 떨었다고 하면서 투덜대며 찾아오자 마술사는 더 이상 호랑이를 도와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술사는 말했다.

“너를 다시 쥐가 되게 해주마. 몸은 호랑이인데도 여전히 쥐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들에게는 인도의 전래동화처럼 쥐처럼 겉모습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내면까지도 변화가 있어야 한다.


다양한 색깔
우리는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물체들이 여러 가지 색을 띠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람 눈에 보이는 것은 빨강, 녹색, 파랑 3원색뿐이며 그 밖의 색은 이 3원색의 빛이 혼합되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으로 우리들 시야로는 색 구분이 어려운 수십만 가지의 색깔도 정보기술을 이용하여 쉽게 만들어 낼 수가 있다.

우리가 육안으로 보이는 것도 어떻게 색을 혼합하느냐에 따라 회색으로 또는 검정색으로 달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세상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 변화하려는 노력 여하에 따라 자기만의 고유한 독특한 색을 만들어가며 세상에 그 자신의 인생이라는 삶의 색깔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삶의 가치
컴퓨터와 통신망의 만남이 경제성을 띠어 새로운 부가가치를 낳는 새로운 패러다임이라 하더라도 정신세계의 소중한 가치는 나 자신의 변화 없이 그것을 찾아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그동안 가장 소중한 것,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에 너무 소홀히 대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느끼며 사랑하며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것은 내일 일은 고사하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만 너무 의존해 살다가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잃는 경우도 허다하기 때문이다.

칼릴지브란의 「아름다운 생각 中에서」나오는 글을 다음과 같이 옮겨 적어본다.

‘겉으로 드러난 아름다움은 물질적 포장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생명의 신비이며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삶과 생명을 한탄하며 불행하다고 절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 숨쉬는 생명을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경이로운 세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처해있는 현 상황이 어렵다고 고민하는 사람과 어려운 상황 가운데도 한 줄기의 희망을 찾아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커다란 결과차이를 가져온다.

어느 두 죄인이 교도소라고하는 감옥에 있을 때 한 명은 땅바닥에 주저앉아 신세한탄을 하며 절망하고 있었고 다른 한명은 창살 밖의 먼 하늘을 쳐다보며 사색으로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두 명은 감옥에서 풀려나게 되었는데 세월이 흘러 땅바닥을 쳐다보던 한명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 거리를 헤매게 되었고, 하늘을 바라보던 다른 한명은 시인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상황이 같다고 할지라도 자기 자신이 처해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이처럼 인생이라는 삶의 결과는 확연히 다르게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마음과 시력을 가지고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함께 걸을 수 있는 건강한 팔과 다리가 있다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인생을 이야기하며 끈끈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와 가족이 있다면 유한한 인생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무형의 자산을 아주 많이 소유한 행복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생후 얼마 되지 않아 눈이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고, 말도 하지 못하는 3중의 고통을 지고 있었으나 설리반 여사의 노력으로 하버드대학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후에 미국의 사회복지 사업가가로서 전 생애를 맹아와 농아를 위해서 헌신하며 희망과 복음을 전해 주었던 헬렌 켈러여사의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 헬렌 켈러 여사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장님으로 태어난 이 보다 더 불행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이에 켈러여사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시력은 있지만 비전이 없는 사람"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녀의 글 가운데 ‘3일만 본다면’ 란 글이 있다. 만일 하나님이 3일만 볼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첫째 날은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과 그리고 하늘에 빛나는 태양을 보고 싶고,
둘째 날은 들에 피어있는 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꽃을 마음껏 바라보고 싶고,
셋째 날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내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 때로는 헬렌 켈러 여사를 역할모델로 삼아 마음의 여유를 갖고 자기 자신을 깊이 되돌아보며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내면의 가치를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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